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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_무라카미 하루키

by 피넛버터브레드 2020. 8. 12.

좋게 말해서, 여전히 모르겠는 소설

 

대학생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

친구 한 명이 이 책을 좋아했고, 이따금씩 이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도 무슨 책인가 궁금해 따라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느낌은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것. 왜 재미없다는 느낌만 남아있을까 궁금했는데, 책을 읽어가며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로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에 비우호적인 내 성향, 그놈의 성적인 내용 없이는 이야기가 안되나? 하는 점, 그리고 주인공 와타나베라는 캐릭터.

 

소설속 간간히 나타나는 60~70년대 일본의 경제상황에 불편함을 느꼈다.

1960년대에 아버지가 우루과이에 갔다는 미도리의 거짓말을 믿은 와타나베라든가,

(해외여행이 얼마나 일반적이었길래, 그는 놀라지도 않고 그냥 믿는다. 우리나라는 1989년에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전면 시행되었다. 물론 이건 비단 경제 문제 때문 만은아니겠지만.)

대학생인 와타나베는 등록금 걱정 따위는 없이 브랜디, 보드카, 시바스 리갈 같은 고가의 술만 마시고,

(나도 작년에야 꼬냑을 처음 마셔봤는데.)

1968년 와타나베와 1970년 레이코는 64년 개통한 세계 최초 고속철인 신칸센을 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패망한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로 고속성장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시대적 배경이나 캐릭터들의 모습에 배알이 꼴려 책 내용에 오롯이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주인공 포함 다수 캐릭터들은 대체로 성적인 면에서 문제거나 혹은 특이한(?) 성향이다. 작중 인물들은 주인공과 성에 대한 대화나 몸의 대화로 커뮤니케이션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풀었는지 작가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다.

(번역가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제목을 '미도리와 청교도처럼 보낸 밤' 이라 지은 챕터가 있다. (이건 출판사마다, 책마다 다름))

일전에 불필요하다 싶게 야한/자극적인 장면이 많이 포함된 대만 영화를 보고 기분이 매우 나빴는데, 아주 조금만 더 가면 그런 느낌을 받을 것만 같았다.

그냥 60억 인구 중 이런 사람도, 이런 사람들과만 우연히도 인간관계를 맺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나.

 

심지어 주인공 와타나베는 처음부터 끝까지 '육체' 타령인데,

특히, 나오코를 잃고 방황하다 만난 젊은 어부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하여 떠들 때 주인공이 하는 생각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친구를 잃은 것이 슬픈 것인지, 어쩌면 자기가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 육체를 상실한 것이 슬픈 것인지.

그리고 미도리에게 하는 행동까지, 한없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적어도 나에겐, 이야기를 푸는 방식이나 캐릭터는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문장은 하나하나 수려해서, 이것이 신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주신 악마의 재능일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그리고 신기했던 것 하나, 자동판매기에서 정종을 구매한다. 자판기의 나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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